[경향신문]너희가 대머리의 설움을 아느냐

[경향신문  2003-07-11 18:45:01]
 
 
‘가발 살인’ 사건 탈모 사이트 회원 탄원 소동 탈모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문제점 드러나
지난 6월 26일 새벽 서울 잠실에 있는 석촌호수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탈모인 홍모씨(37)가 전모씨(37)을 흉기로 살해한 것이다. 세인은 살인 사건이 아니라 살인동기에 더 많은관심을 보였다.

경찰에 따르면 홍씨와 전씨는 ㅎ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띠동갑 동호회원이다. 이날 다른 회원 8명과 함께 한 감자탕집에서 야참을 먹고 있었다. 평소 술버릇이 나빴던 홍씨가 술에 취해 감자탕집에서 소란을 피우자 전씨가 이를 제지했다. 두 사람이 바깥으로 나와다투던 중 홍씨가 쓰고 있던 가발이 벗겨졌다. 홍씨는 마음이 상했다.여자 회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있던 이들은 홍씨가 취했다고 생각, 택시에 태워 집에 보냈다. 여자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을 참을 수없었던 홍씨는 다시 돌아왔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러 왔다며 전씨를찾아간 홍씨는 근처 포장마차에서 훔친 칼로 전씨를 찔러 숨지게 했다.

▲“가발 벗기는 건 죽이는 것과 같아”

홍씨는 경찰 조사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여자들 앞에서 가발을 벗겨 망신을 줘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홍씨의 주장대로 전씨가 홍씨를 놀리기 위해 가발을 벗겼다고 보도되자 ‘탈모인’들은 분노했다.

탈모인의 모임 ‘대다모’(w ww.d aedamo.com) 게시판은 사건이보도된 6월 27일 전씨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 찼다. ‘으음’이라고밝힌 탈모인은 “탈모인이라면 홍씨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는다”며“여자 앞에서 가발을 벗기는 것은 죽는 고통과 다를 바 없다”고 동병상련을 심경을 밝혔다. 아이디 ‘탈모인’은 “아마도 담당판사가대머리냐 아니냐에 따라 형 경감 여부가 결정될 것 같다”며 “(문제는) 대머리의 마음을 ‘정상인’이 모르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드라이아이스’라고 밝힌 탈모인은 “항상 웃음거리가 되는 대머리를 이젠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단합된 모습을보여주고 싶다”고 적었다. 아이디 ‘프21’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잘못됐지만 그 상황이었다면 나도 그랬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홍씨의 변호사 비용을 우리가 모금해서 전달해야 한다”고주장했다.

이런 움직임은 탄원서 제출로까지 이어졌다. 발모촉진제를 판매하는인터넷 사이트인 ‘노볼드’(www.nobald.com) 회원을 중심으로 탄원서를 내자는 움직임이 벌어진 것이다. 회원 ‘sweet’는 “머리카락 없는 심정을 우리 같은 사람 아니면 누가 알아주겠냐”며 “조직적으로 선처를 호소하자”고 제안했다. 노볼드 관계자는 “뜻있는 회원들이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하자고 뜻을 모았다”며 “현재까지 20여 명의 회원이 탄원서를 우리에게 제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 가족과 목격자 사이에서 전씨가 가발을 고의적으로 벗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이런 움직임은 주춤해졌다. 일단탄원서를 준비했던 노볼드측은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라고말했다.

▲당당한 여유 보이는 이들도 있어

탄원서 소동은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보기 어려운 요소를 담고 있다.남 모를 고통을 안고 살아왔던 탈모인이 자신들의 신체적 약점에 대해 조직적으로 대응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대머리’가 가진 설움이 그렇지 않은 사람의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대다모 게시판에서 한 탈모자 네티즌은 ‘내일 모레면 사십되는 총각’이라는 글에서 “39세인데 아직까지 장가를 안 가고 있다. 물론못 가는 게 맞다”고 자신의 심경을 털어놨다. 7년째 여자 구경을 하지 못했다는 그는 소위 일류대 출신으로 사법고시 준비를 했다. 1차시험에 합격했던 고시도 포기했다. 판·검사가 되면 모자를 벗고 다녀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취직을 포기하고 모자를 쓰고일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재미없다’는 아이디를 사용한 이는 “24세인데 2년 전부터 점점없어지는 머리숱 때문에 자신감도 없어지고 인생이 재미가 없다”며“머리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서 그냥 혼자 살고 싶다”고털어놨다. 아이디 ‘자살충동’은 ‘모자 없인 못살아’라는 글에서“모자 없이는 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다”며 “22세, 내 인생을돌려줘”라고 적었다. ‘살고 싶은 세상’이라는 탈모인은 “오늘도화장실에서 머리 만지며 눈물을 흘린다”면서 “내가 ‘옥동자’의신체조건과 외모라 하더라도 숱 많은 머리와 바꾸고 싶다”고 밝혔다.

탈모인은 이처럼 자신의 ‘치부’를 가리고 싶어한다. 홍씨는 이런치부가 드러나자 범행을 저질렀고, 많은 탈모인이 홍씨의 심정에 동정심을 표시했다. 하지만 모든 탈모자가 이렇게 민감한 것은 아니다.오히려 당당하게 여유를 보이는 이들도 있다. 한 탈모인은 미장원에서 동네 아주머니들로 둘러싸인 채 이발을 하면서 “대머리는 정력이좋다며?”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발이 끝난 후 나오면서 “그게과학적으로 맞아요. 머리카락이 빠지는 이유가 남성호르몬이 과다분비돼서 그런 겁니다”라고 순발력 있게 대처했다. 동네 아주머니는대머리 남편 부인에게 “아유, 좋겠다”며 웃어 넘겼다.

이번 사건은 탈모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것이다. ‘대머리’는 큰 얼굴이나 짧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하나의신체 조건일 뿐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돼야 한다는 게 이번 사건을 보는 관계자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우스갯소리를 던져 동네아주머니를 포복절도시킨 한 탈모인처럼 탈모인도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만 들지 말고 한 발짝 물러서서 생각하는 여유를 가지라고 권고한다.


★탈모 전과 탈모 후 삶이 달라져요

탈모인은 자신이 가진 콤플렉스 때문에 항상 주변을 의식한다. 한 네티즌이 적은 탈모 전과 탈모 후의 달라진 삶을 살펴봤다.

첫째, 예전에는 주변에서 미팅이나 소개팅을 시켜주면 군소리없이 나갔다. 또한 친구들에게 미팅 주선을 자주 요구했다. 지금은 소개해준다고 해도 안 나간다. 그러면서 “그냥 돈없고 귀찮아서’라고 말한다.

둘째, 예전에는 여름에 항상 1박 2일로 해수욕장에 가는 등 설렘으로여름을 보냈는데 탈모 후에는 친구들이 피서 가자고 해도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얘기하고 정작 ‘방콕’한다.

셋째, 언제부터인가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이 투철(?)해져서 버스에자리 생겨도 절대 앉지 않는다. 맨 뒷자리에 자리가 생기면 겨우 앉는다.

넷째, 미용실 갈 때 며칠씩 고민한다. 아무도 없을 때 간다.

다섯째,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 언제부터인가 맨 뒷자리만 고집하게 된다. 수업을 열심히 듣고 싶지만 맨 뒷자리만 고집한다.

여섯째, 술집에 친구들과 가면 분위기보다는 조명 상태를 우선 고려한다.

일곱째, 대낮에는 소심한 상태로 있다가 밤만 되면 성격이 적극적으로 변한다.

여덟째, 지나가다 같은 탈모인을 한 번 보게 되면 예쁜 아가씨도 아닌데 꼭 한 번 더 쳐다본다.

아홉째, 사람을 처음 만날 때에는 항상 먼저 머리숱이 많은지 여부를확인한다.

열번째, ‘탈’, ‘머’, ‘대’자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란다.

열한번째, 왜 주위 사람들은 나의 머리만 쳐다볼까 하고 생각한다.

정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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