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활동한 지 1년 3개월이 넘어가는 지금 이제 슬슬 현역 군인으로 치자면 대다모 상병쯤 되겠네요. 아직 까마득한 상관들이 많아서 연혁을 들이대는 것이 좀 부끄러울 정도인데....ㅋㅋ 22세에 입대하여 머리를 박박 깎고 그 어린 나이에 이미 30대 중반쯤의 헤어라인까지 M자가 후퇴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그 충격과 현실부정은 지금도 잊을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군인이라 항상 착모를 해야 한다는 것에 감사하며 거의 하루 종일 모자(하이바 말고 그냥 군모입니다)를 쓰고 일부러 밖에 나가기도 하고 사람 없는 곳에 가서만 모자를 벗으면서 '아 나 이제 어떡하지...' 라고 고민하다가 결국 제대 후 계속 고민만 하다가 작년 4월부터 피나 제네릭을 타 먹기 시작했네요. 평소에 모든 것에 조심하는 성격임에도 일가 친척들 중에 눈에 띄는 탈모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머리카락 하나는 한 번도 걱정한 적이 없었지만... 인생은 정말 뭐가 어떻게 잘못될 지 모르는 짜릿함이 있군요.
많은 탈모인들, 특히 이미 결혼 적령기도 안 됐는데 젊어서부터 탈모가 찾아온 어린 탈모인들은 자기 잘못도 아닌데 한국에서 절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유전적 질환인 탈모가 하필 자신에게 왔다는 사실에 그 엄청난 사기저하가 여자 관계에 있어서의 자신감 저하뿐 아니라 결국 취업, 학업, 동성 간의 인간관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사회생활 좀 하면서 돈이라도 모인 30대 탈모인 선배님들과 다르게 우리는 가진 건 하나도 없는데 잃는 것만 하나 더 생겼다는 억울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럴 때는 결국 정신승리만큼 유용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지고 들어가는 인생, 아득바득 '머리가 빠지는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날 위로해 달라고!' 라는 생각으로 부모님 붙들고 싸우고, 여자들 눈치 슬금슬금 보고, 주변 친구들이 알아채서 파괴왕 '그 분'의 머리에 빗대어서 놀릴까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응 다 X까, 나 혼자 잘 살거야' 하고 마음을 아예 놓아버리시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거지요(탈모관리를 놓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약이 안 듣고 라인유지에 실패해도 '나는 할 만큼 했다'라는 생각으로 그냥 빠르게 포기할 수 있는 마음가짐도 준비해 놓자는 거지요). 기대치가 100인데 현실이 50이면 그냥 기대치를 50으로 낮추자는 말이고, 흔히 말하는 '포기하면 편해요' 를 적용하자는 겁니다.
언뜻 보면 무기력한 패배주의로 보일 수 있는데, 오히려 가성비가 떨어지는(남들같은 노력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워진) '보통의 삶의 길'에서 스스로 눈을 돌림으로서 자신감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죠.
오늘도 편하게 트위터에서 떠들기를 포기하고 몸소 혜화역에 나와서 정부의 수장마저 자살하라며 떠들고 들어가신 그 분들을 보십시오. 의견이나 태도가 상당히 극단적이라 반사회적이라고 욕을 그렇게 먹으면서도 '다 X까'라는 마인드 하나로 그렇게 뭉쳐서라도 당당하게 돌아다니지 않습니까? 욕은 먹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욕만 먹지 아무도 못 건드리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좀 부적절한 비유인 것 같긴 하지만 굳이 그들을 들고 나온 이유는, 사실은 정신이 좀 이상해서 결혼생활이 힘들 것 같은 그런 사람들조차도 '난 안 하는 건데?' 하고 당당하게 걸어다니는 비결은 무엇이냐? '이 X같은 세상, 내가 왜 결혼하고 자손 낳기 위해 애써야 해?' 라는 생각을 한 번만 가지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는 겁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에 실망해서 유지될 필요가 없는 나라라고 판단하고, 어차피 미래가 없는 나라에서 나는 남의 눈치 보면서 희생하기 싫다, 그렇게 빠르게 포기하고 오히려 정신승리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들이거든요. 이상한 사람들이네 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그렇게 못 살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다 키보드 낭인이 나타나서 혜화역 그분들 한두명을 완벽하게 논파한다고 해 봤자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하루이틀만에 똑같은 입장으로 돌아갑니다. 멍청해 보여도 그 쪽이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주변에서 '에이 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라고 백날 말해봐야 그 사람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거 아닙니다. 결국 아무 이유 없이 사회에서 차별받는 탈모인들도 손절할 건 빠르게 손절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혼도 출산도 하고 나면 인생의 질이 심하게 떨어져서 거의 안 하려는 현대 사회에서, 굳이 '아 어찌어찌 결혼해도 자식들에게 탈모 유전되면 어떡하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젊은 나이에 탈모라는 악운이 따랐지만, 반대로 시대가 변해서 가족계획 없어도 괜찮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명예로운 패배의 길'이 열려 있습니다.
제가 연애나 결혼을 포기하고도 약을 먹는 이유는 단 하나, 취업을 위해서입니다. 취업만 성공하면 눈치좀 보다가 30대 중반부터는 그냥 나이와 스트레스로 인해 탈모가 와버렸네~ 등으로 또 약 끊고 정신승리하면서 살 거구요. 어차피 머리 멀쩡한 다른 사람들도 자기 삶 살겠다고 애 안 낳는 바람에 올해 출산율은 1.0도 달성 못 할 거라는 뉴스가 나왔는데, 젊은 탈모인들도 잘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은 탈모 때문에 연애도 결혼도 못 할 것 같으니까 절실해졌지, 막상 풍성한 사람들도 못 하고 안 하는 게 결혼과 출산입니다. 젊은 친구들, 탈모 이전에, 가라앉아가서 이미 갈수록 결혼과 출산이 요원해지는 대한민국이라는 배 안에서 굳이 혼자 자손을 걱정하면서 무기력해지지 말고 빠른 손절과 정신승리로 다들 혼자서라도 잘 사셨으면 좋겠어서 욕 먹을 위험을 무릅쓰고 정신승리의 길을 권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래도 관리는 꾸준히 잘 하셔서 득모하시길.
☞ 본 게시판에서 모발이식 수술 후기는 신고 바랍니다. (삭제 및 탈퇴)
댓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