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달리고, 별을 헬 만큼 하늘이 맑고, 매달린 은행잎보다 떨어진
은행잎이 더 많아진 요즘, 내 모습 같은 그 은행나무를 보고는 덜컥
겁이 난다.
유유히 떨어지는 그 은행잎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떨어진 머리칼 하나가
내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나는 한 손 가득으로 그 머리카락을 집어
내 눈 앞으로 가져와서는 머리칼이 얼마나 가늘어졌나 세세히 뜯어본다.
젠장, 이번엔 굵은 머리칼인데... 미치겠군.
나는 이 가을 왜 윤동주처럼 별을 헤아리며,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詩 등을 생각지 못하고 떨어지는 머리칼 하나에
슬픔과 머리칼 하나에 비참, 머리칼 하나에 절망, 머리칼 하나에 멜랑꼴리,
멜랑꼴리, 멜랑꼴리... 끝없는 멜랑꼴리만 생각해야 하는 건지...
좋은 대학 못나오고, 가진 것 없어도 세상이 불공평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 대머리는 드디어 내게 세상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 세상에 무거운 단어는 지금 모두 내 머리칼 끝에 매어달려 있다.
떨어지는 머리칼과 함께 그 무거운 단어들도 하나씩 떨어져나가 그런
생각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슬픔과 비참과 절망과
멜랑꼴리들은 머리칼이 떨어져나간 그 언저리에 여전히 그리고 더욱
강력한 생명력으로 기생하고 있는 것이다.
중순께 과연 그녀는 대구 집에 내려왔다. 단 3일간만...
그녀와 만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나는 무척이나 분주했다.
오직 머리 때문에... 이 머리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이었다. 이렇게도 빗어넘겨보고 저렇게도 빗어넘겨보고 머리칼이
빠지기 전에도 거의 써본 적이 없는 무스까지 요령껏(?) 발라보았다가
엉망(!)이 된 머리칼에 슬퍼져서는 빌어먹을 다시 머리를 감고...
결국엔 모자를 덮어써 버렸다. 난 모자를 쓸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
난 무슨 특이체질인지 모자를 쓰면 두통이 생기는 더러운 습성이 있다.
작으나마 머리를 전체적으로 조여드는 느낌 게다가 모자창 때문에 시야가
좀 가려지는 듯한 그런 느낌으로 인해 안경을 쓰지 못한 때와 비슷한
두통 증상이 일어나는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런 증상으로 머리칼이 빠져나가도 모자를 쓸 생각은
전혀 못하고 있는데 오늘은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그런 모자를 쓰게
된 것이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으로 그녈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비장하기까지 한
생각으로 나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일찍 집에서 나가 간만에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약속 장소로 향했고... 기다렸다... 계속...
...결국 그 기다림은 6시간도 넘어가버렸다. 약속 시간에서부터 6시간이다.
그 앞시간까지 굳이 붙이면 8시간...(삶의 순간순간은 이렇듯 비극적이게도
드라마틱한 구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같다.) 약속 시간부터 수십 통 그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전화는 들려지지 않았고
시내버스도 거의 막차가 달릴 즈음 그때서야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누나 그런 생각을 했다. 바람(?)을 맞은 거다, 나는.
한편으론 차라리 잘됐다, 싶으면서도 머리 빠지는 꼴(!)이 또 생각나
무지막지하게 서글퍼지기도 했고 그녀에 대해선지 나 스스로에 대해선지
방향이 뚜렷치 않은 화가 막 나기도 했다. 모자를 오래 쓴 탓인지
바람(!)을 맞은 탓인지 정말이지 찬바람을 오래 쐐고 돌아와 몸살 기운이
도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하기도 그리고 몹시 무겁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반나절 동안 쓴 모자를 벗고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잔뜩 눌린 머리칼 사이로 가리마가 왜 그렇게도
넓어보이는 건지... 잔뜩 눌린 머리에 아주 넓은 가리마, 군데군데
형광들 불빛을 받고는 되뱉어놓는 서글픈 내 두피... 손으로 그 머리를
쓰윽 한 번 빗어넘겨보는데 제 멋대로 서고 누워버리는 그 머리칼을
가진 거울 속의 한 녀석이 왜 그렇게도 웃긴 건지...
앞서도 말했지만 잘됐다 싶으면서도 그래도 왜 그녀가 나오지 않았는지
이유는 알아야겠기에 늦은 시간이지만 수시로 전화를 걸다 자정도 훨씬
넘겨서야 반나절 내내 들려지지 않던 그녀의 폰이 들려졌고...
약속에 대한 언급보단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은 이유부터 물었는데
서울에서 자꾸 귀찮은 전화가 온다나... 그 귀찮다는 전화가 어떤
전환지 묻지 못했지만 왠지... 해서는 안될 것 같은 질투가 나기도...
각설하고,
그녀는 메세지 못 받았냐는 거였다. 전화를 끊고 뒤늦게 확인한 거였지만
그녀는 분명 메세지를 남기긴 했지만 난 그날 삐삐를 들고나가지도 못했고
그리고 그녀를 만난다는 생각에 초점이 완벽하게 기울어져 있었기에
혹시나 삐삐에 그녀가 메세지를 남겨놓았을까 확인해볼까 뭐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다. 진작에 메세지를 확인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니까
뭐라 말할 것도 없지만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가 재밌다(?).
전날 밤에 대구에 내려올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얼굴에 뭐가 막 났단다. 그런 걸 뽀드락지라고 그러나, 암튼 붉으스레하게
얼굴에 그런 게 막나서 아침엔 병원까지 갔다오고 그랬단다. 그러다
결국 이런 얼굴로는 안되겠다 싶어 약속 시간이 다 돼서야 메세지를
남겼단다.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건 심지어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가장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어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이해란 것이 자연스레 내 머리칼로 넘어가면서 그녀는 얼굴에 뭐가 나서
그런 얼굴 보여주기가 뭐해서 못나온 거라는데 그러면 엉성하기 짝이 없는
내 머리칼은 어떻게 되는 건가... 절망스럽다.
난 그날 그녀를 만나서 혹여 기회가 된다면 내 머리칼에 대해 고백을
해볼 작정이기도 했다. 그녀를 만났다고 해도 실제로 그럴 용기가
생겼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냥 기회가 되면 그저 친구(?!)이기에
(그녀와 장래를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녀에겐 나 외에도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도 알기에) 앞으로의 어떤 깊은 인연을 염두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연스럽게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리고는
내심 그녀가 나의 이런 머리를 어쩌면 어쩌면 안아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희박해보이는 가능성을 품기도 했었지만 나의 이런 머리 상태와는
비교도 안될 것 같은, 얼굴에 뭐가 좀 난 것 때문에 못 나왔다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는 내가 품었던 생각들... 역시 무리구나, 싶었다.
"사랑은 외부적인 조건이 관념에게 안겨다주는 쾌락"이라고 했던가
사회적 지위, 직업, 권력, 재력, 학력 그리고 외모까지...
예컨대 어느 한 여자가 있어 조건이 완전 동일한(그런 경우는 없겠지만
가정하면) 두 남자가 있는데 한 남자는 머리칼이 풍성하고 또다른
한 남자는 대머리라고 했을 경우 그 여자는 머리칼이 풍성한 남자를
선택했고 그 머리칼이 선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하더라도 여자는
관념에게 안기는 쾌락은 숨겨둔 채 머리칼 많은 그 남자가
나를 더 사랑한다느니 또는 나를 더 잘 이해해준다느니 그런 말들로
포장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순수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랑은 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혼한 대머리는 뭐냐고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에겐
사회적 지위든 또는 직업이든 권력이든 재력이든 학력이든 또다른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
상대의 관념에게 쾌락을 안겨주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난 어떤가, 난 현재 백수며 잘 알다시피 대머리(진행중이지만)다.
나에게 학력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며, 직업도 없고 그리고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일조차 아무런 비젼도 없다. 하루종일 먼지 덮어써야
하고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하나 걱정해야 하는 봉급쟁이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모습도 기대할 수 없으며 부모 잘만나 물려받을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빨리 돈을 벌어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듯한 무언의 시선...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나마 내가 믿을 수 있었던 건 탈모가 시작되기 전 어딜 가나
호감이 가는 인상이라는 그 조건 하나밖엔 없었는데 그 마지막
"외부적인 조건"까지 나는 지금 처절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상에서 다른 이에겐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 대머리는 그저 악재의
수준이 아닌 치명타에 가깝다.
엄마는 이런 나를 의식해서인지 그래도 때가 되면 결혼은 다 하게 돼있다,
라고 강변을 하지만 난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짝 맞추듯이 그런 식으로
결혼할 자신은 없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도 엄마는 많이 찔렸을 것이다.
왜냐면 그리 가까운 친척은 아니지만 명절 때 인사차 종종 들리기도 하는
친척분... 자세히는 몰라도 그 분은 전문대를 졸업했으며 지금 서른 중반
아마 이제 후반으로 넘어갈려는 나이즈음일 것이다. 돈도 그럭저럭
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현재 기독교 방송국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암튼 그분은 미혼이다. 물론 그분은 꽤 심한 편(정수리쪽으로
머리칼의 거의 없다)의 대머리고... 그분도 맞지도 않는 신발짝 맞추듯이는
결혼할 자신이 없는 내 생각과 비슷한 생각을 가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아직 미혼이다.
요즘 TV에서 고문, 고문 떠들어대는 터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고통을 수분하는 질병을 표시가 나도록 때리는 고문이라면 이 대머리는
지치다 지치다 쓰러져 누가 툭 건들지 않아도 혼자서 있는 일 없는 일
다 불어대게 만드는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난 어디까지 더 가야 포기할 수 있을까...
그날 서글픈 생각을 잔뜩 하게 만든 그녀와의 통화를 대충 끝내고
그냥 잠들지 못할 듯싶어 캔맥주 두 개를 마시고 동생이 먹다 남겨둔
것인지 버터구이 오징어 다리를 꾸역꾸역 삼켰는데 그게 또 잘못되어
체한 건지 자다말고 욕실로 달려가서는 손가락을 목구멍까지 틀어박고는
속엣것을 꺽꺽 게워내고는 욕실 문짝에 기대어 퍼질러져서는 진짜
왜 그렇게 눈물이 막 나오는지... 참말로 머리빠지는 주제(?)에
생쇼(!)를 다하고 있다. 나는...
[뒷이야기]
마지막 날 그녀의 얼굴이 그나마 좀 좋아진 건지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겠냐고
점심시간도 넘어서 연락이 왔었는데 나는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있어
어렵겠다고, 정말이지 눈물을 씹으면서 약속을 피했다.
머리빠지면서 바람맞는 기분도 알게 되고 눈물을 씹으면서 거짓말을 하는
기분도 새삼스레 알게 된었다.
그녀는 첫날의 그 일 때문에 내가 그런다고 생각하는 건지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고는 서울 올라가서 다시 연락하겠다고
꼭 편지하라고 그러는데 속에선 뭔가 뜨거워지면서
'사실은 말이죠, HS씨(3년이 다 됐지만 우린 아직도 경어를 사용한다)
내가 머리가 빠지고 있는데 그래도 괜찮은가요?' 뭐 이딴식의 말이
목에 걸려서는 목쉰 듯한 소리로 그냥 알았다고만 했다.
하지만 이제 어렵겠다. 이 대머리는 10년 가까이 서오고 있는
몇 줄의 일기를 쓰는데 필요한 감성마저 모조리 작살(!)을 내버리고 있는데
편지는 언감생심이다.
제기랄, 진짜 콱 주거뻐리까...
헌법에 대머리는 사랑도 해서는 안된다고 박혀있다면 이런 감정들
완전히 버릴 수 있을려나...
더이상 내것이 아닌 열망들아, 내 주위에서 배회하며 나를 아프게 하지 말고
이제는 부디 떠나버려라,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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